제 1 장 모발염색의 역사
Ⅰ. 시대사적 분류
염색과 탈색(dyeing and bleaching)에 대한 의식은 20C에 극적으로 변화되었지만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가장 초기 염료는 자연 추출물인 해너(henna)와 카모밀레였으며 이는 1930년대 후반까지 활발하게 미용 salon에서 사용되었으나, 점차 산화 염모제에 밀려 소모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보안시켜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사용방법으로서 미세하게 가루낸 헤너 식물을 물과 섞여 반죽을 하여 이중 스튜 냄비에 끓여 도포 시술 전에 고객의 이마와 귀 끝의 피부에 물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셀린을 발랐다. 고객의 모발에 도포 시킬 때는 모발은 갈색 종이로 싸서 요구되는 색의 깊이에 따라 30분에서 1시간 가량 방치하였으며 같은 식물염료인 카모밀레(camomile) 가루 또한 금발 빛을 내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염모제였다.
빅토리아(Victorian, 1830~1900년대) 시대의 여성들은 그들의 hair에 백발을 감추기 위하여 주로 염색을 했었다. 이때는 발삼(balsam), 황(sulphur), 흑연(greyness),소뼈(beef marrow), 피마자유(castor oil)의 특이한 혼합물과 함께 탄산칼륨, 글리세린, 암모니아, 알코올 등과 함께 장미 향수(rose water)로 만든 lotion으로 모발에 도포 시켜 색조를 흡착시켰다.
1883년 이후 화학염색제가 Monnet et Cie의 parisian salon에서 사용되었으며 Euqene Schueller에 의해 1909년 최초로 시장에 공개되었다. 공개된 모발 염색제는 L’oreal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상업적으로 제공되었으며 이런 초기 염색제들은 소량의 과산화물(peroxide)과의 혼합으로 다양한 색조를 만들어내는 콜타르(coaltar)의 파생물인 para-phenylendiamine이나 para-tduylene의 복합 성분이었다.
salon에서의 염색 교재(Dye books)는 고객을 위해 비치되었으며 고객에 대한 염색기술은 salon에서만 허용되었다. 이 당시의 미용사들 또한 염색에 대한 실수를 하기도 했었다. hair에 화학제품을 시술한다는 것은 인체에 대해 유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되어져야 한다고 본 저자는 생각한다. 좀더 인간을 존중하며, 우리 스스로가 professional cosmetologist라는 것과 professional에 대한 자긍심을 이 책을 통해 더욱 강조하고자 함으로서 예를든 “Good Hair Days”의 책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다.
1904년에 염모 시술 결과 법적인 처벌을 두려워했던 ‘Anxious’라는 미용사가 법률고문이었던 Messrs Plunkett와 Leader에게 그의 문제에 대해 편지를 보냈다.
"그 고객이 나의 salon에 처음 왔을 때 이미 bleach가 되어 있는 상태로서 그녀 모발은 모근 쪽은 검고 끝은 연한 금발이었으며 바깥쪽은 아주 많이 표백되어 있었다. 그러한 모발 상태에서 나는 파리에서 제조된 염색제(dye)를 사용했었다. 나는 거의 해가 없다고 생각했던 염색 제품으로 모발을 염색했다. 하지만 고객 모발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갛게 되었다. 여러 번의 샴푸와 더 많은 과산화수소로 모발을 처리한 후에 붉은 색을 약간 down(연하게 붉은 색을 가라앉혔지만) 시켰지만 고객은 만족하지 않았으며 고객 자신이 전문가(specialist)를 데리고 다시 왔으나 그 약제를 제거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객이 나에게 소송을 제기할까 두렵다.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법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답변은 냉혹했다. 법률 고문가인 Messrs Plunkett씨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 당신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신이 고객에 대한 treatment과정을 부주의했다면 당신은 변상을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hair dressers들이 고객의 제품에 대한 유해도에 관한 보험상품에 가입하려고 하나 보험사는 이에 대한 상품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예를 들어 볼 때 미국에서는 현재 공공연히 변호사들이 고객을 위해 미용사들의 시술에 따른 모발손상이 되었을 때 변론을 맡아 법으로 해결해 준다고 광고물을 게시하고 있다. 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의 hair dressers들도 준비되어야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비록 화학제품으로 구성된 염색제들에 위해서 고객이 요구되는 색의 효과는 볼 수 있지만, 염색제들은 아주 해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계속 발생되었다. 개에 대한 초기의 실험들은 개의 피를 검게 만들었으며 그 개는 곧 죽어 버렸다.
1931년에 THE ART CRAFF OF LADIES’ HAIR DRESSING의 작가는 salon에서 treatment를 받고 있는 고객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이야기했다. 먼저 작은 뾰루지나 농포들이 나타나고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 수반되어 일종의 습진이 생기게 된다. 피부는 보랏빛을 내는 빨간색이고, 붉어지고 습기 찬 것처럼 되고 액(진물)이 분비된다. 눈 역시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환자는 눈을 뜰 수 없다. 얼굴전체가 부어 오르고 이마는 종종 화상을 입고 물집이 생기고 목은 빨간 반점으로 덮이게 된다. 입술을 빨갛고 부어오르며, 가끔 입의 안쪽 전체가 부어 올라 궤양이 뒤따르게 된다. 또한 두통과 떨림을 느끼고 만성의 경우에는 다리와 발이 부어 오르게 된다.
여기 보고된 발진과 발열, 직접적으로 관련된 관련 있는 폐렴으로 인한 죽음, 그리고 1922년에 한 염색제의 제조자에 대한 잇따른 소송이 있은 후 독일은 복합 염색제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1933년 영국은 미용 salon에서 시술되고 있는 염색제 포장지에 경고문과 patch test을 법적 기재 사항으로 만든 pharmacy and poison act에서 제품에 대한 설명서를 소비자 보호 관점에서 최초로 문구를 내놓았다.
같은 해에 Gilbert Foan도 역시 hair dressers에게 경고했다. “많은 미용사들이 법적 소송비용에 연루되어 왔으며 어떤 경우에는 추가적인 많은 배상금이 보발염색에 의해 독성 피해를 입게된 고객들에게 주어지기도 했다. 소송들 중 일부는 매우 심각해서 많은 보험 회사들은 이제 ‘hair dye risk’라고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해서 미용사 보험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고객 자신도 사회적으로 문제점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에 대한 인식이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염색제로서 젊어 보이는 것만을 위해 어울리지 않게 꾸민 여성들 등 이러한 예를 잘 나타내듯이 Hankel은 그를 찾아왔던 83세의 나이든 고객에 대해 말했다.
“그녀의 헤어는 가늘고 머리숱도 많지 않는 검은색의 hair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색은 금갈색(titian hue)인데 염색 시술 후 검은 빛깔이 나왔다고 하면서 이 검은 색조를 제거하고 더 밝은 색조를 간절히 바랬다고 한다. 이때 당시(1930년대) 유행했던 모발 색은 쥐색(gray) 또는 검은색에서 금발로의 변화 즉 Clara Bow패션에 반대되는 Jean Harlow패션이었다. H2O2는 1818년 화학자인 Thenard에 의해 개발되었지만 다음 세기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그 미용적 잠재력을 알게 되었다. 즉 1930년대에 자연스런 모습에 반대되는 것으로 인공적인 금발에 대한 진짜 유행이 일어났다. 1931년 platinum blonde 같은 영화에서 Jean Harlow 같은 금발의 영화배우들보다 더 금발(blonder)의 히트는 패션에 대단한 변형을 가져왔다.
그 영화에서는 그녀의 머리색깔의 광택은 오늘날 Pamela Anderson 같은 스타와 함께 존재하는 그런 관념을 촉진시켰다. 여성들은 Halow를 흉내내어 그들의 hair를 탈색시켰고 1932년에는 H2O2의 판매가 미국에서만 35%까지 급상승했다. 백금색(Platinum)효과를 내기 위해, hair dressers들은 노란색 색소를 제거함으로서 흰색보다 더 하얀색을 만들어내는 메틸렌 블루(methylene blue)나 희석한 메틸바이올렛 린스(rinse of methyl violet)를 사용했었다.
1964년 후반에 Irving Schulman은 서정적이고 다소 의심하지 않는 듯,Jean Harlow를 전세계를 걸쳐 모방되어진 American beauty의 독창적이고 독특한 유형을 나타냈던 여성으로 간주하며 그 패션의 수명이 30년이상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미국적 미는 모두에게 적용될 수 없었으며 Richard Dyer는 어떻게 이런 대단한 매력의 특정 상표가 지배 집단인 백인 미국인의 가치를 반영하는지에 대해 비평을 했었다. 이런 식으로 1930년대 할리우드의 백금색은 추정상, 실제로는 선발되어지고 우수한 인종으로 제안되어지는, 편견 없는 헤어 컬러의 조장 뒤에 숨겨져 있는 히스테리(hysteria)를 강화시켰다.
Harlow는 26세에 사망했다. H2O2의 반복적인 사용과 그녀의 신장을 파괴시킨 것을 그녀의 두피를 통한 유해 화학물질의 흡수로 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표면적인 것으로서 머리치장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그녀를 죽게 했고, 이러한 유행에 대한 치명적인 관념을 주지시켰다. 지금도 모든 여성들은 적당히 매혹적이 되는 것과 문자 그대로 유행의 희생양이 되는 것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 1930년대에는 더욱 많은 여성들이 H2O2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게 되었을 때, 금발은 그 높은 위치를 잃기 시작했고 얕보는 용어인 ‘bottle blond(hair를 blacking하여 금발이 된 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 이는 비속어로서 단정치 못한 노동계급 여성들의 style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 염색의 발견들은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1946년 Clairol(크레이롤)은 semi-permanent colour rinse 제품들은 시장에 내놓았는데 전의 염색약들의 회색(greying hair)으로 변하는 모발들을 위장하기 원했던 나이 먹은 여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처럼 젊은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잇도록 완벽하게 새로운 개념으로 시장에 내놓았던 번쩍번쩍 빛나는 쥐색의 hair를 위한 것이었다. 모발 색을 바꾼다는 것은(changing hair colour) 지금도 흥미로우며 colour coating에 의해 6주까지 지속시킬 수 있도록 헤어 가닥에 fashionable한 효과를 고객은 원했다.
금발은 1950년대에 할리우드(Hollywood) 배우 Grace Kelly, Kim Novak 그리고 어수룩함과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성적인 방종과 금발의 매력을 가진 Marilyn Monroe를 흉내내고 싶어하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성감을 가지고 사교적인 여자다움의 이상적인 상태는 긴 황금빛 모발의 전통적인 소녀상을 따르고 있는 금발인 Barbie의 등장이 좋은 예가 되었다.
Barunettes(브르네츠)는 1년 내내 부츠를 신고 다닌다. 금발의 여자들은 가죽끈으로 된 샌들을 신는다. 금발의 hair style은 단순히 하나의 겉모습이 아니었고, 금발의 hair는 완전히 심리적이었다. 분명히 hair care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성공적인 광고캠페인 중에 하나이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만약 내가 살아야 하 생명이 단 하나뿐이라면 내가 금발의 hair로 내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은 shirley polykoff(시레이 폴리코프)가 clairol home 염색 장비를 정차시키기 위하여 창작해낸 catch phrase(운동)가 되었는데, clairol의 제품들에 위해 모발 염색은 더 값싸게 쉽게 그리고 집에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clairol 제품들은 일단 한번 적용될 필요가 있었는데 “더 가볍게, 더 색조감 있게’라는 광고 캠페인(campaign)의 잠재적인 모습은 분명히 섹스어필(sexualized)했지만 “-그녀가 합니까” 혹은 “하지 않습니까”(Does she or doesn’t she?) 오직 그녀의 헤어스타일만이 분명히 알뿐이다. 이와 같은 광고 문구들에 의해 여성들의 태도들은 분명히 변화하고 있었다.
1950년대에 hair를 탈색시키고 염색시키는 것은 계속해서 존경받게 되었다.
1950년대에 있어서 원래 가발 산업에 사용되었던 염색들은 사람의 모발에 적합한 것으로 발견되었는데 밤나무(chestnut)로부터 적갈색과 포도주색, 빨간색과 푸른 흑색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새로운 어두운 색조의 계열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그 염모제들은 para-dyes들보다 더 안전했고 집에서 사용하기에 아주 쉬웠다.
1954년도에 미용 자가 betty Page(베티 페이지)가 사람의 hair 색깔을 바꾸는 것은 의심스러운 취행이거나 예술가인체 하는 것은 더 이상 아니다라고 말했다. 젊은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며, 염색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나이게 대한 억제를 발산시키고 있었다. 새로운 상품들의 이러한 포용을 위한 한가지 분명한 요소는 몇 년간의 전쟁기간의 검소함 이후 머리염색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었다.
1955년에는 염색소에 대해 약간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natural brown’의 색상선정이 모발에서 밝은 초록색의 그늘로 변화되는 부적절한 효과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염색약들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Raymond(레이몬드)는 그 염모제를 실험하여 평판을 얻은 최초의 hair dressers중 하나가 되었는데 처음에 표백으로 모발을 재색 금발과 바꾸었고 다음에 그것에 다가 아주 진한 커피나 차 색깔로 물들였으며 마침내 특수한 냄새를 감추기 위해서 두 방울의 정향유 기름을 넣어서 서로 섞이게 했다.
Vidal Sassoon은 그릇에 20개나 되는 과산화물을 3방울 정도(three drops)의 암모니아(ammonia)를 섞을 때에 질이 나쁜 탈색제를 만들어 내는 것을 기억해 냈다. 나는 암모니아수를 더 첨가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정확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내 손이 떨려서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정성 들여 만들어진 표백수의 극적인 변화 때문에 여성들의 모발이 아주 엉망이 될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것은 금발이 되고자 하는 신화를 단지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것이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미용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루이스웨스는 이것을 분명하게 말했는데 “금발이 없다면, 여성은 단지 또 하나의 깜찍한 얼굴일 뿐이다. 그리고 예쁜 얼굴들은 흔해빠진 얼굴들이다.”
팝송과 춤 문화는 1970년대 영국 미용시장의 흐름에 영향을 주었다.
Torremollinos tan은 Glitterball이 비추는 디스코 무대에서도 하이라이트로 견주어 볼만하다. 금발처럼 1950년대에 줄무늬(stripping, 껍질 벗기는)의 hair style은 뜻의 차이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고 Forsting이라는 좀더 여성적인 이름이 붙여졌을 때 기피해야 하는 무엇으로 생각되어 지기도 했었다.
20C초에 햇빛에 그을린 듯한 헤어스타일은 실내에서 일하고 레저를 즐기는 백인들과 같은 그러한 사람들이 아닌 밖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들의 모습을 가리키기도 했다.
심지어 coco chanel(1883-1971,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디자이너로 본명은 Gabrielle Bonheur Chanel이다. 20세기 여성복의 토대를 마련한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이 sun-kissde처럼 보인다고 발표했을 때 이는 여전히 Gillbert Form이 hair의 성분 노출에 대하여 충고하고 그것을 holiday scalp라고 칭했을 때 1930년대 초의 패션계의 순환에 제한을 가했다. 그는 공휴일 시즌엔 많은 고객들이 햇빛에 탈색한 머리, 그리고 바짝 마른 머리에 심각한 경향이 일어난다고 경고했다. 몇몇의 예로 무질서하게 가닥가닥 전체를 탈색한 머리, 부분적으로는 탈색한 노랗거나 strawish 빛깔의 긴 머리 형태의 형성을 위한 바탕이 되었다.
Clairol은 1960년대 말에 나이든 사람들은 젊게 보이게 하고 싶으면 색깔을 사용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개념이나 아름다움보다 치료책을 더 강조한 것과 새로운 직원들은 젊게 보이도록 회색 hair로 변화시키기를 권장했으며 변화된 hair color에 의해 사업도 성공을 가져다 준 것 같은 이러한 심리적 경향을 이용했다. hair는 염색되고 있다. 영국의 제조업자들은 광고를 통해 명백해지지 않더라도 회색(gray hair)은 필수적인 염색의 색깔이라고 Grecian 2000에 대한 홍보를 가했다. 다색의 hair와 부풀리기 위해 뒤로 빗은 hair style을 한 양성자인 히피족과 염색을 즐겨했던 David Bowie(본명 David Robert Jones, 1947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 짙은 화장과 밤무대에나 어울릴 듯한 반짝이 의상, 망사 스타킹, 하이힐, 심할 때는 드레서로 몸을 휘감고 등장한 중성적인 데이빗 보위의 퍼포먼스는 당시 성(性)정체성을 일시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었으며 21세기가 되면서 모든 사람들의 성구별이 모호해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가 될 것이라는 보위의 말 또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의 hair style을 통합한 10년 간의 새로운 hair style이 단절 없이 다음 악장으로 넘어가는 재미있는 지시 기호를 만들어낸 Glam 락커들(팝 록을 터보로 과격한 연주를 하면서, 그들은 아이라이너, 립스틱, 플랫폼 부츠와 난폭한 무대의상을 입었다. 그 음악은 종종 섹스를 연상시키는 표현, 서민적인 생활이 느껴지는 이미지 그리고 매우 전염적인 코러스를 제외한 반복으로 특징 지워진다)에 의해 시도되었다.
1970년대 holiday scalp를 야기 시키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모발 탈색이나 hair의 광택을 없애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번쩍번쩍하고 과장되고 너무 많은 화려한 액세서리와 경주용 차의 띠나 그 밖의 것으로 잘못 장식이 된 다소 어떤 우아한 자동차처럼 보이게 된다. 만약 당신이 줄무늬나 Frosting헤어스타일을 하려 한다면 정확하게 하라...그렇지 않으면 아예 하지 말라. 70년대에는 남자들도 마침내 염색을 할 것인지 새로운 생각을 기성세대에게 전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1972년 Bowie의 모발 색은 비록 1980년대에 와서 그의 변화가 비난을 받고 맥주 색깔의 hair color는 미식축구선수들에 의해 쇠퇴되었다 할지라도 밝은 주황색이었고 short style에 모발 끝은 뾰족하게 하는 펑크에 뒷머리는 길었다.
1970년대 말에 금발의 새로운 해석은 펑크의 출현을 일으켰다. 펑크는 좋은 미각이나 건전하진 않으나 값싸고 진득진득하게 이용되었다. 펑크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여 1970년대 말기 패션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초기 1980년대까지 펑크 스타일의 hair 가닥에 네온 줄들은 더욱 학생무정부주의자 혹은 중년의 근본적인 여권주의자의 상징인 것 같이 보였다. 외향적 이미지는 지난 1979년대에 헤어 드레싱 문화로 구체화되면서 제작자들은 무스, 헤어 겔이 가장 큰 영향을 불러일으킨 기이한 염료와 같은 소비자가 다루기 쉬운 모든, 새로운 범위의 고착성 제품으로 응답했다. 이 새로운 제품은 1970년 이전 밝은 색만이 유한한 식물성 염료의 사용으로 성공했던 것처럼 빛 바랜 머리칼에 가장 큰 작용을 하고 거리 문화에 그리고 쇼크를 원하는 이들에겐 주된 비약적 진보였다.
펑크 헤어스타일은 1980년대 고딕문화(Goths, 파시즘, 죽음, 악마주의)로 변질되었다. 여기 극도로 back comb하여 염색된 검정머리와 검은 옷과 style에서 남녀 구분이 없는 모습은 ‘the Jesus and Mary Chain and The Cure’(로큰롤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불려질만한 크나큰 반향과 노이즈 기타의 선발주자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를 마련, 그에 어울리는 무대 매너와 여러 시끄런 사건 등으로 독보적 아성을 지니고 아이러니 하게도 팝의 위대함을 증명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밴드, 수많은 관련 밴드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던 이들은 퍼펙트 멜로디를 지향하는 팝 그룹으로 불려지길 희망했다.
지독히 무례한 소음들, 공연장의 폭동야기 등의 전부 일 것이라는 비관적 관망에서도 섹스 피스톨스 이후의 충격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로 연일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신인 밴드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결과일 것인데 어느 정도는 쇼 비즈니스 적 계획이었음을 시인하고 초창기 제대로 연주가 가능했던 멤버가 없었다는 레이드 형제의 황당한 발언도 어쩌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여하튼 인기와 명성을 거머쥐고 더해서 저주의 대상이었던 이들의 성공이 길게 이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다른 멜로디 애호가였던 레이드형제의 주장(거의 자만심 가득한)이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이들의 사운드가 보편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들이 이룩한 업적은 같은 맥락의 밴드에게는 교과서나 다름없는 애티튜드를 정의한 것이었고 슈게이징의 방향을 제시한 가장 큰 영향력 내의 밴드로 대접받고 있는 실정이다.
큐어의 앨범들을 보면 밴드의 20여 년 간의 활발한 음악 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흥미롭게도 출발에서는 당시 U2와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비슷한 데뷔 시기와, 70년대 말 정통 펑크(Punk)가 뉴웨이브에 영향을 주면서 나타난 사운드의 특징인 스트레이트함. 또한 두 밴드는 활동 처음에는 미국보다는 출신 지역인 영국/아일랜드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후 두 밴드는 세계적인 유명한 밴드로서 기존의 다른 밴드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길로 들어서며 90년대 이후의 새로운 조류에 영향을 주었다.)와 같은 그룹에 의해 독립적인 레코드 라벨에 발행된 음악을 듣고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머리 모양은 새로운 로맨틱과 Toyah, Grace Jones, Phil Oakey의 길고 짧은 쐐기 모양 cut 같은 팝스타들의 스타일에 가장 극적인 영향을 보였다.
1980년대 주름잡은 곤두세워 부풀린(back comb 을 넣은) hair style의 개념은 노동자 계급의 여자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부유한 미국인의 공상생활양식은 얼굴에 hair가 충분히 흘러내리도록 주위 깊게 염색하고 층을 내던 상류사회에서 변형된 형태를 통해 채택되었다. 여성들은 hair에 염색을 하고 층을 내기 시작했다. 드라마 ‘Dallas’에서 영감을 얻은 곤두세워 부풀린 hair style이 유행하였으며, 여성 파워를 뜻하는 헬멧 스타일의 Margaret Thatcher수상의 모습에서 변형된 형태로 가장 잘 보여졌다. 그 커다란, 심하게 고정되고 spray된 style은 단단한 헬멧처럼 보이게 하며 확고히 그녀를 자연스러움보다 세련되게 하였다. 이러한 고도로 인공적이고 심하게 고정된 헤어스타일은 volume을 주는 기법으로서 전문적인 hair design에 의해서만 표현되었으며 hair style은 그 사람의 지위를 타나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복고 스타일은 여성 fashioner 계의 운동인 '성공을 위한 드레스' 또는 '파워드레싱'의 부분으로서 단발머리의 부활과 같은 시기에 존재했다.
1980년대에 정치에 여성의 진출이 증가되고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적당한 외모로 대한 주제에 대한 기사들이 연일 다루어 졌으며 결국에는 파워드레싱이라 불리게 되었다. 1980년대의 힘있는 복장을 한 여성들에 대한 진정한 반응은 1990년대 초기의 지저분한 모양과 New Age Traveller 운동이었다.
1980년대의 인위적인 확장 대신에 엉키고, 자연스런 모습을 만드는 dread lock된 머리 모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모발과 패션스타일과의 유지에는 고의적으로 힘쓰지 않는, 자연에 충실함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위해 횐색 모발을 표현하고자 하는 색다른 시도들이 있었고, 그러한 모습들의 집합은 하나의 저항이 되었다.
1990년의 화이트 컬렉션(white collection)에서 1990년대 후기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미학을 예측 발표함으로써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잡았다. 흰 색깔은 1990년대 신세대에 대한 옷에 ‘니르바나(Nirvana)’와 같은 활자체의 슬로건으로 장식한 옷을 입은 모델들 사진에 맞는 색이었다. 팝 뮤직은 세계적인 음악이 되었고, TV의 광고는 창고구역이나 술집 바 대신에, 사람들의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다를 돌아보는 풍경들을 방영하였다.
만약 우리가 60년대에는 반항자처럼, 80년대는 감각적인 여자처럼 보이기를 바랐다면 90년대는 되살아난 걸 스카우트처럼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매스컴 황제인 테드 터너(Ted Turner)까지도 대의명분을 위해 몸을 바친다 하면서 녹색 운동의 소동에 뛰어들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영화배우 제인 폰다(Jene Fonda)에게 ‘함께라면 우리가 지구를 구할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 청혼을 했다고 한다.
신세대(New Age)라는 말은 어쩌면 모호하고 또 포괄적인 용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상품들, 특히 여성들을 겨냥한 것들은 다시 평가하는데 매우 성공적인 방식 이였다. 크리스털, 타로 카드, 향료 치료제 그리고 그 밖의 대체 용구들을 판매하는 런던 콘펜트 가든에 있는 일류 new age 센타인 Mysterise에서 만난 한 여성 고객은 붙임성 있게 말했다.
‘Caring(케이링)’은 1990년대 초의 전문적 유행어였고, 모발 제품과 관계를 맺기 위해 모발 보호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었다.
1990년대에 hair를 염색하여 금발이 된 사람은 일종의 법률을 위반하기 쉬운 대체 미의 예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격식을 벗어나 자살을 한 금발의 paulayeats는 Bob Geldof(아이리쉬 태생의 록 스타)와의 이혼으로 언론에 비방을 당했다. Halow가 겪었던 것과 스타일이나 내용 면에서 유사한 그런 신문의 공격에서 그녀는 표백제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인해 점점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졌다. 그녀 hair의 비속성은 그녀의 성적 매력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두 가지 이유로부터 고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졌다.
어쨌든 hair는 신체의 변화를 위해 고대부터 이용된 부분이었지만 고대부터 이용된 hair가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 또한 영원하지 않았다. 성형수술과 다르게 비싸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적다. 새천년에 대한 우리가 접근하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태도가 1990년대의 시작보다 더 부정적이고 좀 더 극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앞선 천년의 긴장감 속에 잡혀 있고, 반이상국주의자들은 세계가 인구와 공해문제에 있음을 지적하나, 이상국주의자들은 새 기술에 대한 진보를 기초로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점차 모조나 둔부 대체 등의 부분으로 인공을 사용함에 따라 점차 더렵혀지고 국경이 사라진다. 인공은 앞서는 기술 같아 보이지만 새로운 미의 표현 참조와 염색체 연구의 증가로 언젠가 우린 우리의 복제인간에서 장기를 이식 받아 영생을 누릴지도 모르겠다.
젊음이 최고이고 과거는 섞어간다. 그래서 소비문화가 가능한 길게 수술됨을 안정시켜 보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상품효과를 가져왔다. 물건은 20말의 소비자 의존원 구도에 의해 돌고 돈다. 예를 들어 염색과 관련되어 근원적인 오욕은 완전히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채도들이 많이 변했다. 만약 회색머리가 염색이 아니라면 매우 비범해 보일 것이다. 상품이란 이용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염색한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점점 전문직이 되었다.
소비자 문화들은 여성들에게 매우 즐겨 쓰이게 되어서 참여할 수 있는 이점을 가져오고 냉소적인 사고 방식은 녹색의 전체개념을 발달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사이버문화와 인공물로 가장된 자연의 체제의 위에서 과학적 성공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패션디자이너인 ‘Rudy Gernreich가 우리는 자웅양성의 미래에 남녀의 성구별 없이 똑같이 대머리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우리의 모발에 대한 관심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점점 가발들은 마음대로 쓰거나 벗을 수 있는 자주적 정체성을 지닌 포스트모더니즘 개념과 21C에 양식을 구성하는 일시적인 자연을 반영하는 데에 사용되어 졌다. 신체는 지금 성형 수술이나 헤어 기수의 긴 계통에 의해 예견된 잡종생물이다. 한 미용작가(beauty writer)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탈색을 하거나 염색을 하기 전에 잘 생각하라. 왜냐하면 일단 시작하면 계속 진행을 위해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자연은 당신이 태어났을 때 자연이 당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색의 조화 속에서 잘 어울리도록 해주는 너무나도 훌륭한 미용사이다.” 대부분의 세기동안 우리는 염색, 파마, 표백, 머리를 부풀리는 것과 가발과 같은 인공적인 수단을 통해서 색깔과 조직을 변화시켰다. 더 이상은 ‘자연적인’헤어스타일 같은 것들은 없다. 그러나 전에는 있었던가?
There is no longer any such thing as a ‘natural’ hair-style. But was there ever?
원서 “GOOD HAIR DAYS”에서 인용하여 본 저자는 미용사로서 학문을 하는 후학들에게 같은 심정으로 물음을 던져본다.
출쳐:http://www.cyberbeaut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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